해당 글은 펠덴크라이스 ATM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쓰여진 글입니다. 좀더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 펠덴크라이스 ATM 원서 및 번역서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ATM 체험은 서울 신촌 힘의집(houseofstrenght.kr)에서 열리는 펠덴크라이스 ATM 모임에 참여해보세요.
선택의 자유와 잠재력 발견
“나에 대해 가능한 한 가까이하여 배우지 않으면, ‘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 될겁니다. 그리고 선택의 자유 없이는 삶은 달콤하지 않습니다.” “Life is a process of time, and time cannot be fixed. Without learning to know ourselves as intimately as we possibly can, we limit our choice. Life is not very sweet without freedom of choice.”- Moshe Feldenkrais
자기 이미지에 변화를 줌으로써 사회적으로 고정된 위치, 오랜 시간 구축되어온 성향이나 습관, 본능에 매몰됐거나 억압적인 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 스스로를 고통케 하는 대부분의 트라우마나 근골격계 질환도 좀더 편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유기체적인 생명체로 더없이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옳고, 그름의 윤리적 기준을 따르거나,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식의 바르고 성공적인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 판단은 각자에게 맡긴다. 자기 이미지가 어떻든 무엇을 발현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에 해당된다. 물론 사회 윤리적인 기준에 거스린다면, 공동체가 부과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판단이 어떻든 ‘나’의 가능성과 ‘나’의 잠재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영화 ‘어둠속의 댄서’에서 주인공 셀마는 사회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시력을 읽어가고, 사기를 당하며 위태로운 상황에 몰린다. 그녀는 그저 생명이 붙어있는 정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점점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고 끔찍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순간순간 ‘나’라는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해낸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어떤 순간에서도 꺼내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선물을 열어보는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풍족하든, 가난하든, 억압을 받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좀더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좀더 넓은 선택지는 ‘나’라는 존재 속에서 스스로 발견해야만 한다.
돈을 벌고, 직업을 얻고,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 사회가 각자에게 부여하는 선택지는 사회 유지에 필요한 정도이며 매우 제한적이다. 청소년 시기에 주어지는 선택의 범위는 RPG 게임 속 케릭터 육성 루트 정도에 그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주어진 선택지 중에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때문에 이 사회가 제공하는 몇 안되는 조건들을 경쟁하듯 추구할 수 밖에 없다. 이 조건들은 사회 유지에 필요한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사회적 성취로 구성되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매우 단순한 게임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이 구조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복잡미묘하고 통합적인 존재를 적절히 거르고 재단해야 한다. 이 과정은 사회적 조건화를 통해 자기 이미지를 변환하는 작업으로, 이 과정에서 ‘나’는 사회적 작업을 위한 대상에 불과하다.
즉, 사회적 조건이 ‘나’라는 존재보다 더 가치가 커지고 만다. 행복을 위한 조건이 행복보다 더 가치가 커지고 만다. 사람들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닌, 사회가 제공하는 턱없이 제한적인 ‘행복의 조건’을 추구하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인류의 욕망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하는 기계 문명이 등장한다. 공생 관계에 있는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제공한다. 아마도 행복을 위한 조건을 제한없이 충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행복할 수 없었다. 도리어 의심을 품거나 적응하지 못하며 낙오한다. 기계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인간과의 공생을 위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매트릭스를 재설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은 선택의 자유 속에서, 마음 껏 가능성을 펼쳐야하는 존재다. 이 가능성이 제한될수록 존재 가치는 낮아지고 당연히 행복 지수는 떨어질 것이다.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청소년의 행복지수가 턱없이 낮은 근본적인 원인이 여기 있다고 본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운가 아닌가를 의식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 덕분에 본능에 매몰되거나 억압되지 않을 수 있었고 적극적으로 문명을 가질 수 있었다. 칸트는 자기 이성에 명령하고 이를 따를 수 있는 의식을 인간 존재의 근간으로 여겼다. 이 세상 속에 그저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존한다고 볼 수 없다. ‘나’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자기 이미지로 발현해낼 때, 우리는 역동적인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억압적인 사회를 극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잠재력을 더욱 끌어내는 사람들은 자기는 물론 사회 이미지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문화를 선도해간다.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사회적 성취에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나’의 잠재력을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성취는 평균적 수준에 그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원하는 ‘자기 이미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회가 아닌 ‘나’를 더 가까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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