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신의 몸 내부를 인지하는 것은 대부분 부분적이고 단편적이다. 또 그렇게 인지한 내용도 많은 경우 부정적이다. “배가 부글거려요.” “무릎이 아파요.” “목이 뻣뻣합니다.” “코가 막혔어요.” 이런 부정적 표현이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지녀온 청교도적인 사고가 자기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하는 것도 자만으로 여기고 좋지 않은 태도로 간주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내부를 인지하다 보면 많은 경우 죄책감에 시달린다. ” – 엔들리스웹, R. Louis Schulta
이번 포스팅 화두입니다. ‘왜 사람은 자신의 몸에 대해 부정적인가. 왜 몸을 부분적이고 단편적으로 제한하는가?’
먼저 소매틱스 요법 중 하나인 휄든크라이스 세미나에서 보았던 재밌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일본 고베에서 열린 세미나였는데, 그때 했던 동작은 일명 꽃받침 자세에서 하늘을 보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움직임을 학습하고서 피드백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실제 동작 사진은 없어서, 비슷한 이미지 첨부)
[youtube]https://youtu.be/QhCKgvyjtBY[/youtube]
(피드백 주고받는 분위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일본인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동작을 하면 여기가 아픕니다.”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미아 시걸 선생님은 “그래? 그럼 동작을 다시 해보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본인은 동작을 반복하며 이럴 때 여기가 아프다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구나. 그럼 좀 다르게 해보겠니.” 말씀하셨고, 그 일본인은 요청대로 동작을 몇 번 다르게 해보다가 “이렇게 하니 안 아프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렴.”
사람들은 대부분 ‘통증 해결’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생명력 넘치는 전체성을 자각하지 못 합니다. 스스로 몸을 단편화하고, 삶까지 위축시키고 제한합니다. 저 일화 속 일본인처럼 통증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실제로는 통증에 집착하는 꼴이 됩니다. 이처럼 통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육체는 물리적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관념적으로 말할 수 없다.” 라 지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의 신체 문제가 과연 단순히 육체 문제일까요? 마음과 육체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음은 이제 더 이상 신비 동양 사상이 아닙니다.
부분적 통증의 원인을 추적하고 해결하는 방법까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 통증에 집착하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증 해결’이 잘 되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옛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소유냐 존재냐’의 기로 속에 소유를 선택한 현대인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의 저자)
현대인은 신체를 소유하려 듦으로써, 진짜 자신自身인 소마soma로부터 바디body를 객체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신체는 그저 내 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신체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 ‘위에서’ 살아간다. 나는 이 위에 있고 신체는 저 아래 있으며, 나는 저 아래에 있는 신체와 기본적으로 편안한 관계에 있지 않다. 나의 의식은 거의 ‘전적으로’ 머리 의식이다. 즉, 나는 내 머리이고, 나는 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 내 신체는 나의 소유물, 즉 ‘나’가 아니라 ‘나의 것’으로 전락했다.” – 무경계, Ken Wilber
그래서 운동, 움직임을 할 때 보면 바닥으로부터 전달되어오는 힘(중력과 장력)을 느끼기보다, 머리로부터 투사되는 ‘바디 이미지’에 더 집중합니다. 심지어 그 ‘바디 이미지’ 조차 자기 것이 아닌 ‘타인의 것’입니다. 통증 없는 몸, 힙업, 몸짱, 힘짱, 잘록허리, 등등 외부로부터 투사된 “바디 이미지” 입니다. 목표를 달성할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진짜 자신의 몸(생명력 넘치는 소마)는 그 “바디 이미지”로 끼워 맞춰집니다.
(범람하는 바디 이미지, 구글 검색)
“한마디로, 신체는 하나의 대상 또는 투사물이 된다. 전유기체 위에 하나의 경계선이 세워지고 그렇게 해서 신체는 ‘나 아닌 것’으로 투사된다.” – 무경계, Ken Wilber
몸. 움직임은 자기 주체성과 전체성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전혀 특별한 얘기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힙업, 몸짱, 힘짱” 등등의 단편적 목적들이 여러분의 몸뿐만 아니라 삶까지 객체화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은 한편으로 고통스럽고 폭력적/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한 몸, 움직임, 삶을 지향해보세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잠깐 멈추어 ‘자각’에서부터 출발하면 됩니다. 자각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앎에 도달한 상태, 즉 자존과 현존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며 도달 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로만 설명한다면, 자각은 형식에 기대어져 이 또한 개념에 의존하는 꼴이 됩니다. 결국 간접적인 앎에 그칩니다.
“직접 인식이 바른 지혜의 첫째 요소이다.” – 비움, Osho Rajneesh
자각을 ‘있는 그대로(실재)’ 체험하기 위해서는 실재적 방법(호흡,명상,수련,요가,무술,무도,여행,종교,독서 무엇이든)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수많은 방법들이 실재 체험으로 이어지기보다 ‘방법을 위한 방법’으로 집착될 때, 오히려 자각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방법으로 ‘움직임’을 선택했지만, 사실 ‘움직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움직임’의 형태를 빌려온 ‘놀이’입니다. ‘놀이’의 형태를 빌려온 자존과 현존의 표현입니다. 소매틱스, 펠덴크라이스, 케틀벨 리프팅, 메이스벨, 주르카네 스포츠, 페르시안밀, 클럽벨, 무용, 요가 이 모든 게 저에게 놀이로 다가옵니다.
이제 곧 저의 소매틱스 펠덴크라이스 워크샵이 열립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즐겁게 담론하고, 체험하는 날이 됐으면 좋겠네요.
(이란에서 찍은 아이들. 아무런 목적 없는 순수한 반응, 전체성과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