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아기 시절,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앉고 기고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노인이 되어서는 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누군가는 걷기 조차 힘들까요? 그 이유는 전자는 나이가 들어도 움직임의 통제권을 그대로 갖고 있는 반면, 후자는 나이가 들면서 그 통제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통제권을 잃습니다. 그 것은 노화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자연적 노화 현상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보통은 자연적 노화 현상으로 불릴 수 없는 수준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자세가 구부정해질 어떠한 보편적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마틱스 분야의 선구자, 토마스 한나 박사는 노화는 신화라고까지 말합니다.
통제권을 잃는 것. 이를 토마스 한나의 저서 ‘소마틱스’에서는 ‘감각운동기억상실증‘이라 정의합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등이 굽어진 자세를 삶 속에서 반복합니다. 책상, 자동차, 식탁, 지하철에서 우리는 장시간 등을 굽히고 앉아 있습니다. 어느덧 무의식적 반복에 의해 자세가 고착됩니다. 그리고는 앉아있지 않을 때도 무의식적으로 등을 굽힙니다. 이런 무의식적 통제 불가한 상태를 ‘감각운동기억상실증’이라 합니다.
이에 대해 소마틱스는 제 1자(자기) 스스로 등을 펴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Somatics는 최근 학술 용어로는 소매틱스로 번역되고 있고, 대중적으로는 소마틱스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소마틱스라 쓰고 있습니다. 하여튼 사실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만 들어서는 흔한 말입니다. 거북목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노력도 스스로 자세를 바르게 하려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소마틱스는 당연히 그런 노력과 구별됩니다. 역설적으로 소마틱스는 몸을 교정하는 노력과 거리가 멉니다.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는 노력은 어떤 이상적 신체 이미지를 상정하여 자신을 교정하는 행위입니다. 이상적 신체 이미지는 엄밀히 말해, 진짜 나로부터 나오는게 아닙니다. 이미 대상화되어, 제1자 ‘자기 이미지’와 구별된 제3자 ‘타자 이미지’입니다.
“다양한 요가, 운동, 그리고 바디워크 수련법들이 신체의 정열을 강조한다. 나는 바른 자세와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신체 정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렬이란 말은 ‘정적인 이미지나’ 완벽한 모양’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 소마지성을 깨워라 (저자:리사 카파로, 역자:최광석) –
그렇다면 소마틱스에서 말하는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사람은 부분적 움직임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움직임은 전체적입니다. 걷고 뛰는 것은 물론, 손으로 등을 긁는 행위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모니터를 보며 앉아있는 순간에도 머리를 가누고 척추를 바로 세우며 나름의 움직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력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한, 모든 동작은 ‘전체성’을 갖습니다.
소마틱스는 이러한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스스로 굽은 등을 선택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자각한다는 의미는 무의식적으로 고착된 움직임 패턴을 의식적 차원으로 가져오는 인지적 접근을 말합니다.(위 감각운동기억상실증 설명 이미지 참고) 이 과정을, 소마틱스 분야의 대표적 요법 중 하나인 휄든크라이스에서는 ‘움직임을 통한 학습’이라 간결하게 말합니다. 이 학습의 결과로 ‘자각’ 능력이 개발됩니다. ‘자각’ 능력이 좋아지면 몸 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있어서 변화를 얻게 됩니다. 특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마틱스와 휄든크라이스는 예술인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몸을 의도에 따라 정교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악기를 다루든 몸을 다루든, 매우 중요합니다.
자 여기까지 소마틱스에서 말하는 ‘선택’을 다시 정의하면, 선택했음을 자각하고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A라는 선택을 내가 했음을 분명히 인지/자각하고, 또 다른 B라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상태입니다. A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B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되는 게, A를 B로 바꾸는 작업이 아닙니다. A를 없애거나 고치는 해결이 아닙니다.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게 아니라, 둘다 선택 가능성으로 남겨놓고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때, A는 ‘해결’되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굽게 하는 A부터 B, C, D, E, F, G 무한한 선택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즉 자유를 얻습니다. A면 어떻고 B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내 통제 안에 있습니다. 통제권을 회복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아예 근원부터 ‘해소’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부분적인 통증에 집착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력 넘치는 전체성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픈 사람도 생명력이 자신의 최대치로 넘침을 자각 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넘치기에 그만큼 아플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픔에만 집중하면 그 넘치는 생명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전체성을 회복하고 나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 가능성의 새싹을 피워내는 것이야말로 소마틱스와 바디워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여러분을 교정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가능성의 문으로 안내 할 뿐입니다.” – 소마앤바디 소매틱 레슨이 추구하는 방향. http://cafe.naver.com/somaandbody/6302
아래 영상은 신체 굴곡 패턴 움직임을 탐구하기 좋은 아치앤플래튼 동작입니다. 이 동작과 함께 “[칼럼] 자꾸만 떠오르는 망상, 자꾸만 긴장되는 어깨. 대안은 같다” 에 등작하는 백리프트 동작도 함께 해보시길 바랍니다.
[youtube]https://youtu.be/aoTThy3Qsmg[/youtube]
움직임을 탐구하세요. 근육을 강화하거나 늘린다는 관점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움직임 탐구를 통해 내 몸. 소마를 직접 체험/자각하고 알아갑니다. 특정 근육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머리 끝부터 다리 끝까지, 알아차릴 수 있는 모든 변화들에 자기 감각을 기울이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편안하게 움직입니다.
움직이는 과정에서 몸 뒷면 어느 부위에 체중이 실리고 어떻게 옮겨가는지 감지해봅니다. 이를 통해 움직임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받게 됩니다. 어디에 체중이 실리게 많이 실리게 되면, 어딘가는 가벼워집니다. 일종의 시소 놀이 하듯, 힘이 들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다가 바로 누워 쉽니다.
동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몸의 뒷면과 앞면의 길이 변화와 척추 전체의 연동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동작을 일부러 부드럽고 우아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일종의 의미 부여입니다. 차라리 널부러져 있다는 느낌으로, 그저 움직임의 “의도”에 집중합니다.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아이처럼 움직임 그대로를 체험하고 느끼세요. 어떠한 의미부여도 하지 마세요.
p.s
현대인은 긴장과 이완의 대립 속에 있습니다. A라는 긴장을 어떻게 하면 B라는 이완으로 바꿔놓을지 고민합니다. 마사지도 해보고, 스트레칭도 해봅니다. 잠깐 효과가 있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A를 B로 바꾸려는 노력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긴장과 이완을 이렇게 대립시켜 놓아서는 투쟁만이 남습니다. 이완을 쟁취하더라도 자유는 잃습니다. 청교도적으로 자신의 몸을 제한하고 항상 바른 자세를 강조하며 엄격하기 그지 없어집니다. 항상 분노와 억압에 휩쌓여 있게 됩니다. ‘계몽’ 아래 사람을 핍팍하는 시대를 닮습니다.
20대 초, 저는 긴장과 이완에 대한 구분 짓기를 명확히 하는 곳에서 요가와 케틀벨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의심이 되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엄격함에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당시 썼던 메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