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운동’이라는 말은 사전에 없다. 그런데 내가 만들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고대 운동’이라는 표현은 이미 있었으니까.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름이 없으면 안 되는 순간이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름이 없었다. 그렇게 발견한 이름이 ‘고대운동’이었다. 이 글은 그 이름의 이야기다.
나는 2012년부터 십 년 넘게, 오래 농익은 운동 문화들을 찾아다녔다. 이란의 주르카네에서 페르시안밀을 돌렸고, 인도의 아카라에서 흙바닥 위에 맨발로 섰고, 러시아에서 케틀벨 스포츠 전지훈련을 소화했다. 그 사이에 소마틱스와 바디워크를 공부했고, 펠든크라이스 메소드 프랙티셔너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같은 질문이 따라다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름이 없었다.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는데,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통 운동”이라고 하면 씨름이나 택견이 떠오른다. “민속 운동”이라고 하면 박물관 냄새가 난다. “고대 운동”이라고 띄어 쓰면 어떤가. 고대 그리스의 레슬링도 고대 운동이고, 로마 검투사의 훈련도 고대 운동이다. 범위가 너무 넓어서 아무것도 가리키지 못한다.
띄어쓰기 하나가 만드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빨간 모자”는 빨간색인 모자 전부다. 아무 모자나. 그런데 “빨간모자”라고 붙여 쓰면 동화 속 그 아이 하나가 떠오른다. “현대 무용”은 요즘 추는 춤 전반이지만, “현대무용”은 하나의 장르다. 두 단어가 붙는 순간, 넓던 뜻이 좁아지면서 이름이 된다. 언어학에서는 이걸 복합어화compounding라고 부른다는데, 나는 이 용어를 한참 뒤에야 알았다. 돌아보면 내가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흩어져 있던 운동 전통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붙여 쓴 것이다.
고대운동.
2024년 9월, 한겨레 신문이 ‘현대인의 고대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지면에 ‘고대운동’이 붙여 쓴 그대로 실렸다. 내가 만든 말이 내 손을 떠나 신문의 언어가 된 날이었다..
고대운동이라는 범주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주르카네Zurkhaneh. 페르시아 말로 ‘힘의 집’이다.

이란에서 주르카네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수십 개의 액자가 사방에 붙은 원형의 운동 공간. 모쉐드라 불리는 연주자가 북을 치면, 그 리듬에 맞춰 모두가 하나의 호흡으로 움직인다. 운동이 끝나면 위층에 둘러앉아 홍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운동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감. 나는 그것을 거기서 처음 느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이 훈련 체계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사실보다, 북소리에 맞춰 함께 움직이던 그 시간이 먼저 기억난다.
아카라Akhara. 인도 전통 레슬링의 수련 공동체다.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에는 아카라라 불리는 힘의 사원이 있다. 그곳의 수행가들은 힘의 신 하누만을 모시고, 흙바닥 위에서 조리와 가다를 돌린다. 한번은 소마앤바디 원정대로 함께 간 여성분이 있었다. 평소 힘의집에서 메이스벨을 수련해온 터라, 꽤 중량감 있는 메이스벨을 별 무리 없이 돌렸다. 그 순간 거기 있던 사람들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외국인이 돌리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여성이 돌리는 것은 상상 밖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고대운동이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작동하는 훈련이라는 것을, 그 장면 하나가 증명했다.
케틀벨Kettlebell. 나는 이 도구의 뿌리가 페르시아에 있다고 본다.
주르카네의 도구들과 형태와 쓰임의 뿌리를 공유하면서,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건너가 스포츠로 진화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동작을 최대한 반복하는 지구력의 스포츠. 러시아에서 전지훈련을 하며 배운 것은, 이것이 단순한 근력 훈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주기화라는 과학적 훈련 설계가 있고, 그 안에서 몸은 스윙의 리듬을 통해 효율과 인내를 동시에 배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도구가, 다른 대륙에서 다른 얼굴로 자란 것이다.
셋을 묶는 실 — 진자
서로 다른 대륙에서 태어난 이 셋에는 공통점이 있다. 수백 년 이상 실전에서 검증됐다는 것. 근력만이 아니라 정신의 수양과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담고 있다는 것. 피트니스 산업이 설계한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랐다는 것.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태극권도, 요가도 이 조건을 다 충족한다. 그렇다면 고대운동만의 것은 무엇인가.
진자다.
페르시안밀이 어깨를 축으로 호를 그리며 돌아간다. 메이스벨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내려온다. 케틀벨이 다리 사이에서 솟구쳤다가 돌아온다. 가만히 보면 전부 진자의 궤적이다. 무게가 중력에 떨어지고, 그 떨어지는 힘을 타고 다시 올라가는 왕복. 왕복이 반복되면 리듬이 된다.
“우리 몸도 하나의 펜듈럼. 패턴을 인지하고 진동을 자각할 것.” — 2013년 3월의 메모
십 년도 더 전에 끄적인 메모인데, 지금 보니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리듬을 갖고 있다. 그런데 리듬 없이 살아간다. 고대운동은 그 리듬을 되찾는 운동이다. 주르카네에서는 북소리에 맞춰 온몸이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이고, 케틀벨 스포츠에서는 10분이라는 시간 안에서 호흡과 스윙이 하나의 파동이 된다. 그 리듬 속에서 몰입이 일어나고, 몰입의 형태로 움직임이 몸에 새겨진다.
현대 피트니스의 대부분은 직선이다.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밀고, 당기고.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 고대운동은 원이다.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고, 그 순환 안에서 리듬이 만들어진다. 이 리듬이, 주르카네와 아카라와 케틀벨을 하나로 묶는 진짜 실이다.
이름은 레이블이 아니다
크로스핏, 필라테스, 요가, 칼리스테닉스. 현대 피트니스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이 장르를 대표하고, 그 아래 커뮤니티가 모이고, 산업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주르카네를 하는 사람, 아카라에서 훈련하는 사람, 케틀벨을 돌리는 사람은 각자 고립되어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모르거나, 알아도 연결될 언어가 없었다. “나는 고대운동을 한다” — 이 한 문장이 가능해지는 순간, 이 사람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일 수 있다.
이름이 생기면 정체성이 생긴다. 정체성이 생기면 커뮤니티가 생긴다. 커뮤니티가 생기면, 문화가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내가 이 모든 것을 왜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오라클에게 묻는다. 당신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오라클이 답한다. “넌 선택을 하러 온 게 아니야. 이미 선택은 했어. 넌 네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러 온 거야.” 나도 마찬가지다. 이 일을 할지 말지는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다.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하러 가는 중이고, 이 연재가 그 길이다.
다음 글에서는 고대운동의 몸— 진자가 몸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룬다.